제시해주신 링크(https://www.youtube.com/watch?v=mQmuMLs7TNM)는 YouTube 채널 '설화담'에 게시된 옛날 이야기(민담·설화) 영상입니다.
🎬 영상 개요
채널명: 설화담
영상 제목: 제 아비에게 팔려 간 딸, 폭포 뒤 호랑이가 지켜 온 15년의 비밀 | 설화담 옛날이야기
영상 길이: 약 1시간 57분 35초
영상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mQmuMLs7TNM
📖 주요 줄거리 요약
어머니의 미스터리한 실종과 홍연의 외로운 성장 [02:50]
충청도 보은 속리산 자락 사기골의 처자 홍연은 손재주가 뛰어났으나, 10살 때 어머니 윤씨가 눈보라 속 약초를 캐러 갔다 범에게 물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큰 슬픔에 잠깁니다 [03:06], [04:29].
노름꾼 아버지 홍만석의 행패 속에서도 홍연은 어머니의 유품인 '연꽃 수가 놓인 붉은 비단 조각'을 품에 안고 견뎌냅니다 [06:15], [07:35].
아비의 노름빚과 억울하게 팔려갈 위기 [09:44]
홍연이 18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막대한 노름빚을 지고 악명 높은 한양/청주의 권세가 장진사 대게 홍연을 첩으로 팔아넘기는 매매 문서에 도장을 찍습니다 [11:03], [14:09].
장진사댁 부엌종 덕실을 통해 그곳에 첩으로 들어간 여인들이 모조리 살해당하거나 사라졌으며, 집사 곽돌쇠의 가죽 주머니 속에 비리 장부가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20:34], [22:27].
이 과정에서 어머니가 사라진 날 역시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딸을 지키려 100년 묵은 산삼을 캐러 갔다가 사고를 당했음이 밝혀집니다 [16:10].
폭포 절벽에서의 투신과 굴속 산군(호랑이)과의 만남 [26:34]
비 오는 날 밤, 홍연은 친정/마을을 도망쳐 상주로 가려다 곽돌쇠와 아버지 일당에게 쫓겨 구룡소 폭포 절벽에 내몰리고, 결국 폭포 아래 소용돌이로 몸을 던집니다 [28:36], [34:00].
정신을 차린 홍연은 구룡폭포 뒤 동굴 속에서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거대한 호랑이 산군을 만납니다 [37:41].
산군은 홍연을 해치지 않고 어깨에 붉은 비단 치마를 덮어주었는데, 그 치마는 사라졌던 어머니의 붉은 연꽃 치마였습니다 [39:48], [40:31].
15년 전의 진실과 산군의 고백 [48:16]
산군은 말문이 열려 15년 전의 진실을 알려줍니다 [48:20]:
20여 년 전, 새끼 시절 덫에 걸렸던 자신을 풀어준 이가 바로 홍연의 어머니 윤씨였습니다 [49:46].
15년 전 눈보라 날, 얼어붙어 임종을 앞둔 윤씨를 산군이 체온으로 밤새 품어주었고, 윤씨는 *"우리 연이를 부탁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붉은 치마를 건넸습니다 [53:20], [54:34].
아버지는 아내의 시신을 이용해 관가에 범에게 물려갔다고 거짓 신고를 한 뒤 위로금을 챙겼던 것입니다 [56:03].
악인들의 습격과 폭포 물길의 신통력 [57:52]
아버지는 홍연과 산군을 잡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포수, 산적, 곽돌쇠 패거리를 끌고 동굴을 습격합니다 [59:22].
총탄과 칼날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산군은 홍연의 앞을 지켜냈고, 신통력으로 폭포의 물길을 끌어들여 악인들을 소용돌이 속으로 쓸어버립니다 [1:06:01], [1:09:06].
홍연의 간곡한 부탁으로 산군은 소용돌이에 빠져 죽어가던 아버지 홍만석까지 목숨을 건져주어, 아버지는 비로소 자신의 악행을 눈물로 뉘우치게 됩니다 [1:12:59], [1:14:44].
비리 장부 폭로와 권선징악 [1:15:29]
곽돌쇠가 떨어뜨린 가죽 주머니 속에서 장진사 일가의 음모, 뇌물, 독살 기록이 담긴 결정적 장부를 확보한 홍연은 암행 온 새 현감(민치겸)에게 이를 올립니다 [1:16:31], [1:21:27].
산군의 안내로 '범바위' 아래 묻힌 어머니의 무덤과 산삼이 발견되어 15년 동안의 억울함이 일시에 풀리고, 장진사와 곽돌쇠 일가는 처벌을 받아 재산이 몰수됩니다 [1:22:46], [1:25:21].
아버지는 곤장형과 함께 유배/쫓겨나 평생 참회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1:28:13].
산신각 개창과 호랑이 산군의 마지막 [1:29:54]
홍연은 범바위 아래 어머니 무덤 곁에 '산신각'을 짓고 어머니가 남긴 연꽃 자수를 완결하여 산신도를 그리며 살아갑니다 [1:31:07], [1:33:00].
산군은 세월이 흘러 백호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홍연과 마을을 보호하다 바위(범바위)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아 마을의 수호신이 됩니다 [1:49:16], [1:52:14].
비늘 가락지의 약속 ― 아비에게 팔려간 처자와 용소(龍沼)의 푸른 비늘 신선
🎬 [오프닝 - 차분하고 은은한 가야금과 대금 소리]
옛날 옛적, 효종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충청도 보은 땅, 속리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선 골짜기에 갈목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지요. 아침이면 산허리마다 안개가 띠처럼 걸리고, 저녁이면 계곡물 소리가 마을 지붕 위로 낮게 깔리던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는 폭포 아래 물웅덩이를 '용소'라 부르며, 함부로 발을 들이지 않았답니다. 그 물속에 사람도 짐승도 아닌 무언가가 산다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내려왔기 때문이지요.
오늘 밤 들려드릴 이야기는 바로 그 용소에 얽힌 사연입니다. 탐욕에 눈이 먼 아비에게 팔려 갈 처지가 된 한 처자, 그리고 흉측한 비늘을 두른 채 수백 년을 홀로 물속에서 보낸 한 영물의 이야기. 무섭다면 무섭고, 따뜻하다면 한없이 따뜻한 이 옛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시겠습니까.
1. 갈목리의 연화와 어머니의 푸른 가락지
갈목리 맨 끝, 개울을 건너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초가 한 채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윤연화라는 열일곱 살 처자가 살았지요. 마을 사람들은 그저 '연이'라고 불렀는데, 연이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칭찬을 보태곤 했습니다. 손끝이 야무져 바느질이 곱고, 말씨가 부드러워 어른들 앞에서 늘 반듯했으며, 무엇보다 남의 아픔을 제 것처럼 여기는 마음씨를 지녔다는 것이었어요.
연이의 어머니 송씨 부인은 연이가 열 살 되던 해 겨울, 모진 고뿔 끝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날 밤, 어머니는 앙상해진 손으로 딸의 손을 꼭 쥐고 무언가를 쥐여 주었지요. 그것은 가락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락지가 참 묘했어요. 금도 은도 아니고 옥이라 하기에도 어딘가 달랐습니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얇은 조각을 둥글게 말아 놓은 듯한데, 햇빛에 비추면 물결 같은 무늬가 일렁이고, 물에 담그면 오히려 따스한 기운이 손가락에 스며들었답니다.
"연아, 이건 어미가 너만 할 때 얻은 것이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남의 손에 넘기지 말거라. 언젠가 이 가락지가 너를 지켜 줄 날이 올 게다."
어머니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린 연이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날 이후로 가락지를 실에 꿰어 목에 걸고, 저고리 안쪽 깊숙이 감추고 다녔지요. 밤마다 그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연이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유일한 위로였습니다.
문제는 아비였습니다. 연이의 아비 윤만석은 한때 보은 관아에서 아전 노릇을 하던 사람이었어요. 셈이 밝고 말재주가 좋아 한동안은 제법 살림을 일구었다지요. 하지만 송씨 부인이 세상을 뜬 뒤로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관아에서 장부를 손댔다는 의심을 받아 쫓겨난 뒤로는, 낮에는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시고 밤이면 투전판을 기웃거리며 세월을 보냈지요. 처음엔 엽전 몇 닢이던 노름빚이 해마다 불어나더니, 어느새 집 뒤편 손바닥만 한 밭뙈기와 소 한 마리까지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연이는 아비를 원망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남의 집 빨래를 해 주고, 삯바느질로 쌀 몇 줌을 얻어 와 아비의 끼니를 챙겼지요. 아비가 술에 취해 들어와 밥상을 엎어도, 말없이 사금파리를 주워 담고 다시 상을 차렸습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살아 계시던 시절의 아비로 돌아오리라는, 실낱같은 믿음을 놓지 못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한번 탐욕 쪽으로 기울면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법인가 봅니다. 그해 여름, 장마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요. 아비 윤만석은 보은 읍내 큰 투전판에서 하룻밤 사이에 쌀 서른 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고 말았습니다. 갚을 길은 없었고, 빚을 놓은 쪽은 하필이면 보은 고을에서 가장 세도가 당당하다는 권필상 진사 댁 마름이었지요.
2. 권진사 댁 마름의 방문과 문틈으로 엿들은 거래
권필상 진사는 보은 고을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대대로 벼슬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나 진사시에 붙었으나, 끝내 대과에는 오르지 못했지요. 대신 그는 재물을 모으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흉년이면 곡식을 풀어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갚지 못하는 집의 논밭을 헐값에 사들였어요. 고을 안팎의 논 절반이 그의 손에 들어갔다는 말이 돌 정도였답니다. 나이는 어느덧 예순을 바라보았는데, 본처 말고도 첩을 둘이나 두고 있으면서 또 새 첩을 들이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지요.
어느 비 오는 저녁, 연이네 초가 사립문 앞에 갓을 삐딱하게 쓴 사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권진사 댁 마름 장두칠이었어요. 얼굴에 마마 자국이 얽고 눈이 가늘게 찢어진 그는, 마을에서 '독사 마름'이라 불릴 만큼 인정사정없는 사람이었지요. 장두칠은 마루 끝에 걸터앉지도 않고 선 채로 윤만석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윤 서방, 빚 갚을 날이 열흘 남았소. 쌀 서른 석, 이자까지 쳐서 마흔 석이오. 마련은 되어 가시오?"
윤만석은 손을 비비며 굽실거릴 뿐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장두칠은 한동안 그 꼴을 지켜보다가, 문득 부엌 쪽으로 눈길을 돌렸지요. 마침 연이가 아궁이 앞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는데, 불빛에 비친 연이의 옆얼굴을 장두칠은 오래도록 훑어보았습니다.
연이는 그 눈길이 싫어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그날 밤, 아비와 장두칠은 방 안에서 한참이나 소곤거렸습니다. 연이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무심코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말소리를 듣고 말았지요.
"진사 어른께서 그 댁 따님을 셋째 소실로 들이고 싶어 하시오. 빚 마흔 석은 없던 일로 하고, 따로 쌀 쉰 석을 얹어 주시겠다는구려."
"쉰 석이라……. 허나 그 애가 순순히 가려 할지……."
"윤 서방, 그건 아비 되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한 가지 더 있소. 진사 어른께서 따님이 지닌 패물도 하나 빠짐없이 챙겨 오라 하셨소. 특히 어미한테서 물려받은 가락지가 있다지? 그건 꼭 가져오시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이의 손에서 바가지가 툭 떨어졌습니다. 첩으로 팔려 간다는 것도 서러운데, 어머니의 유품인 가락지까지 내놓으라니요. 더 이상한 것은, 권진사가 그 가락지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느냐 하는 점이었습니다. 연이는 그것을 단 한 번도 남에게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직 아비뿐이었습니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아비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어요. 그 목소리에는 망설임보다 들뜬 기색이 더 짙게 묻어 있었습니다.
"가락지까지 넘기면……, 쉰 석에 스무 석은 더 얹어 주셔야 하지 않겠소."
연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았습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요. 아비는 딸의 몸값을 흥정하고 있었고, 어머니의 마지막 정표마저 값을 매기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연이는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지붕 위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답니다.
이튿날 아침, 아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연이를 불러 앉혔습니다. 그리고 마치 크나큰 복이라도 내리는 양 말을 꺼냈지요.
"연아, 네 팔자가 피었다. 권진사 댁에서 너를 데려가겠다는구나. 그 댁에 들어가면 비단옷에 쌀밥이요, 다시는 남의 빨래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될 게다. 이레 뒤에 가마가 올 것이니 그리 알거라."
연이는 고개를 들어 아비를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눈 속에 단 한 조각이라도 미안한 마음이 있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아비는 딸의 눈을 피하며 담뱃대만 뻐끔거릴 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연이는 깨달았어요. 기다려 온 아비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요.
3. 곰배 영감이 들려준 용소의 옛이야기
그날 오후, 연이는 빨랫감을 이고 개울로 나갔다가 발길을 돌려 산 어귀의 오두막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약초를 캐며 홀로 사는 노인, 곰배 영감이 살고 있었지요. 허리가 활처럼 굽고 한쪽 다리를 저는 탓에 곰배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속리산 골짜기 구석구석을 제 손바닥 보듯 훤히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연이의 어머니 송씨 부인과도 각별한 사이였어요. 어머니가 앓아누웠을 때 약초를 달여다 준 것도, 장례 때 관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 것도 곰배 영감이었으니까요.
연이가 울먹이며 사정을 털어놓자, 영감은 한동안 말없이 곰방대만 빨았습니다. 그러다 연이의 목에 걸린 실을 가리키며 나직이 물었지요.
"연아, 그 가락지……, 아직 가지고 있느냐."
연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저고리 안에서 가락지를 꺼내 보이자, 영감의 눈빛이 이상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는 가락지를 만지지도 않고 그저 오래도록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리고 마치 먼 옛날을 더듬듯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네 어미가 열네 살 적 일이었지. 그해 봄에 큰물이 져서 용소 아래쪽 여울에 고기잡이 그물이 잔뜩 걸렸더란다. 네 어미가 나물 캐러 갔다가 그 그물 속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구나. 팔뚝만 한 크기에 온몸이 푸른 비늘로 덮이고, 주둥이가 길쭉한 것이 도마뱀 같기도 하고 잉어 같기도 했다지. 그물에 칭칭 감겨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는데, 마을 장정들이 보면 요물이라고 때려죽일 게 뻔했어. 네 어미는 그걸 품에 안고 한참을 걸어 용소까지 데려가 놓아주었단다."
연이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어요.
"며칠 뒤에 네 어미가 다시 용소에 갔더니, 물가 바위 위에 그 가락지가 놓여 있더란다. 누가 두고 갔는지는 끝내 몰랐지. 네 어미는 그걸 평생 지니고 살았어. 그리고 나한테 딱 한 번 이렇게 말했지. '아저씨, 이건 그 아이가 준 거예요. 저는 알아요.'"
영감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연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습니다.
"용소에 무엇이 사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옛날 노인들은 이무기라고도 하고, 용이 되다 만 것이라고도 했지. 비 오는 밤이면 폭포 소리 사이로 낮게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사람도 있고. 허나 나는 수십 년을 그 골짜기를 드나들었어도 해코지를 당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히려 길을 잃었을 때 어디선가 물소리가 나를 이끌어 준 적은 있었지."
영감은 곰방대를 탁탁 털고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연아,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요즘 권진사 댁에 낯선 술사 하나가 드나든다는구나. 이름이 도문이라던가. 풍수를 본다느니 부적을 쓴다느니 하는 자인데, 며칠 전에 그자가 용소 근처를 기웃거리는 걸 내 눈으로 보았다. 그 진사가 왜 하필 네 가락지를 탐내는지……,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
그 말에 연이의 등줄기로 서늘한 기운이 흘러내렸습니다. 첩으로 팔려 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막연하지만 섬뜩한 예감이 들었지요. 오두막을 나서는 연이에게 곰배 영감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만약에 말이다, 정말로 도망칠 곳이 없거든 용소 쪽으로 가거라. 사람이 무섭지, 그 물이 무서운 게 아니다."
4. 장대비 쏟아지던 밤, 뒷문을 열어 준 포졸 막동이
곰배 영감의 오두막에서 돌아온 뒤로 연이의 하루하루는 바늘방석 위에 앉은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아비는 그사이 권진사 댁에서 미리 받아 온 쌀 열 석을 헛간에 쌓아 두고는, 날마다 그 앞을 서성이며 흡족한 얼굴로 쌀가마니를 두드렸지요. 이웃 아낙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려오는 날도 있었습니다.
"쯧쯧, 제 자식을 팔아 쌀가마니를 들였다는구먼."
"송씨 부인이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리겠어."
그런 말이 들릴 때마다 연이는 차라리 귀를 막고 싶었어요. 동정이든 손가락질이든, 그 모든 말이 결국 자기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웠으니까요. 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그 혼사를 막아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권진사의 세도가 워낙 무서웠던 탓이지요. 그 집안 눈 밖에 나면 이듬해 소작을 떼이는 것은 물론이고, 관아에 엉뚱한 송사가 걸려 집안이 쑥대밭이 되기 일쑤였거든요.
그렇게 엿새가 흘렀습니다. 가마가 오기로 한 날을 하루 앞둔 저녁, 하늘은 아침부터 잿빛 구름으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요. 해가 질 무렵이 되자 기어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빗줄기가 어찌나 굵은지 지붕의 이엉이 찢겨 나갈 것 같았고, 개울물은 금세 불어나 흙탕물이 되어 콸콸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요.
그날 저녁, 권진사 댁에서는 사람을 보내 연이네 집을 지키게 했습니다. 혹시라도 신부가 달아날까 염려했던 것이지요. 마름 장두칠이 거느린 머슴 둘이 사립문 앞을 지켰고, 관아에서 빌려 온 포졸 하나가 뒤꼍에 배치되었습니다. 권진사가 고을 사또와 친분이 두텁다는 걸 생각하면, 포졸까지 동원된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요.
그 포졸의 이름은 막동이였어요. 스물을 갓 넘긴 앳된 얼굴에 키만 껑충하게 큰 청년이었는데, 어린 시절 갈목리에서 자라 연이와는 한 개울에서 가재를 잡으며 큰 사이였습니다. 막동이가 일곱 살 때 개울에 빠져 허우적댈 적에, 마침 빨래하러 나왔던 송씨 부인이 치마폭을 걷어붙이고 뛰어들어 건져 낸 일도 있었지요. 막동이는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했답니다.
밤이 깊어 아비가 술에 곯아떨어지자, 연이는 미리 싸 둔 작은 보따리를 품에 안았습니다. 보따리라고 해 봐야 어머니가 입던 낡은 저고리 한 벌과 주먹밥 두 덩이, 그리고 바늘쌈지 하나가 전부였어요. 목에 건 가락지를 한 번 더 손으로 확인한 뒤, 연이는 숨을 죽이고 부엌 뒷문을 살며시 밀었습니다.
문밖에는 빗속에 도롱이를 걸친 막동이가 서 있었지요. 연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이제 끝이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막동이는 소리를 지르기는커녕 사방을 한 번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연이 누님, 어서 가시오. 앞쪽 머슴들은 주막에서 얻어 온 술에 취해 졸고 있소. 개울 건너 산길로 가면 당분간은 눈에 띄지 않을 거요."
"막동아, 너……. 이러다 네가 경을 치면 어쩌려고."
"저는 누님 어머니 덕에 목숨을 건진 놈이오. 은혜도 모르고 누님을 묶어 보내면 그게 어디 사람이오? 걱정 마시오. 날이 밝으면 뒷간에 갔다가 놓쳤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오."
막동이는 자기가 쓰고 있던 삿갓을 벗어 연이의 머리에 씌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품에서 부싯돌과 작은 칼 한 자루를 꺼내 쥐여 주었지요.
"산속은 밤이 길고 짐승도 많소. 이거라도 가지고 가시오. 그리고 누님, 권진사 댁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이번 일이 그냥 혼사가 아닌 것 같습디다. 그 술사란 자가 진사한테 '가락지만 손에 넣으면 일은 다 된 것'이라고 하는 걸 내가 들었소. 무슨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 가락지를 빼앗기지 마시오."
연이는 고개를 깊이 숙여 고마움을 전하고는, 빗속으로 몸을 던지듯 뛰어나갔습니다. 개울은 이미 무릎께까지 불어나 있었지만 연이는 돌아보지 않았어요. 차가운 물살이 발목을 휘감고 치맛자락이 몸에 착 들러붙었지만, 오직 앞으로, 산 쪽으로만 걸음을 옮겼지요.
5. 속리산 골짜기의 추격과 낭떠러지 끝에서
산길은 생각보다 훨씬 험했습니다. 낮에도 발 디딜 곳을 가려 가며 오르던 길이 한밤중 빗속에서는 온통 미끄러운 진흙과 날 선 바위투성이였지요. 나뭇가지가 얼굴을 할퀴고, 발밑의 돌멩이가 굴러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하늘이 번쩍 갈라지며 번개가 칠 때에만 잠깐씩 앞길이 보였고, 그 빛이 사라지면 다시 먹물 같은 어둠이 사방을 덮었어요.
얼마나 올랐을까요. 숨이 턱까지 차올라 바위에 기대어 잠시 쉬던 연이의 귀에 멀리서 징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을 쪽에서 횃불 여러 개가 줄지어 산으로 오르고 있었지요.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도록 기름을 잔뜩 먹인 횃불이었습니다. 그 불빛이 마치 산을 기어오르는 불뱀처럼 꿈틀거리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달아난 것이 들통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잠에서 깬 아비가 딸이 없어진 것을 알고는 길길이 날뛰며 권진사 댁으로 달려갔다고 하지요. 권진사는 노발대발하며 집안의 머슴들과 장정들을 불러 모았고, 거기에 더해 웃돈을 주고 고용한 산적 무리까지 풀었답니다. 산적이라니, 양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지만 권진사는 개의치 않았어요. 그만큼 연이를, 아니 연이가 지닌 가락지를 놓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기다! 저 바위 쪽에서 뭔가 움직였다!"
누군가의 외침이 빗소리를 뚫고 올라왔습니다. 연이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섰어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발바닥은 이미 돌부리에 찢겨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곰배 영감의 말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지요. 도망칠 곳이 없거든 용소 쪽으로 가거라.
연이는 폭포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빗소리와 뒤섞여 처음에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귀를 기울이니 분명 저 너머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왔어요. 그 소리를 따라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는데, 등 뒤의 횃불은 어느새 손에 잡힐 듯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헐떡이는 숨소리와 칼집이 부딪치는 쇳소리, 그리고 그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지요.
"연아! 이 못된 년아!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네가 아비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비였습니다. 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손에 쥔 재물을 놓칠까 봐 악을 쓰는 목소리였어요. 연이는 그 소리에 귀를 막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발밑의 땅이 뚝 끊겼지요.
앞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였습니다. 그 아래로는 하얗게 부서지는 폭포수가 깊고 검은 물웅덩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어요. 바로 용소였습니다. 번개가 다시 한번 하늘을 가르자, 물웅덩이의 수면이 거울처럼 번뜩였지요. 그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을 만큼 짙은 검푸른 빛이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횃불을 든 사내들이 반원을 그리며 다가오고 있었어요. 맨 앞에는 마름 장두칠이 있었고, 그 옆에는 검은 도포에 붉은 끈을 맨 낯선 사내가 서 있었습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고, 손에는 쇠사슬 한 꾸러미와 누런 부적 다발이 들려 있었지요. 그가 바로 술사 도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비틀거리며 따라온 아비 윤만석의 얼굴이 횃불 아래 일그러져 있었어요.
도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습니다.
"아가씨, 그만 내려오시지요. 우리가 원하는 건 그 목에 걸린 물건 하나뿐이오. 순순히 넘기기만 하면 진사 어른 댁에서 편히 사시게 해 드리리다."
그 말에 연이는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막동이의 말이, 곰배 영감의 걱정이 모두 사실이었던 것이지요. 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의 가락지였습니다. 연이는 목에 걸린 가락지를 손바닥에 꼭 쥐었어요. 손안에서 가락지가 이상하리만치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지요.
"이건 우리 어머니 거예요. 죽어도 못 드립니다."
"허허, 고집도. 그럼 할 수 없지. 잡아라!"
사내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습니다. 연이는 눈을 질끈 감았어요.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뒷걸음질로 허공에 몸을 맡겼습니다. 차가운 빗줄기와 폭포의 물보라가 한꺼번에 얼굴을 덮쳤고, 귓가에서는 아비의 비명 같은 고함이 아득히 멀어져 갔지요. 몸이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 온 세상이 하얗게 부서졌고, 그다음은 끝없이 깊고 고요한 어둠이었습니다.
6. 눈을 뜬 동굴 속, 푸른 비늘의 이물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꿈속의 소리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더니, 이마 위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지요. 연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낯선 동굴이었어요. 천장은 둥글고 높았으며, 바위 틈새마다 이끼가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그 빛 덕분에 사방이 은은하게 밝았는데, 마치 물속에 비친 달빛처럼 일렁이는 빛이었지요. 동굴 한쪽으로는 맑은 물이 고인 웅덩이가 있었고, 그 너머로 폭포 소리가 멀리서 둔하게 울려왔습니다. 아마도 폭포 뒤편 바위 속에 숨겨진 동굴인 듯했어요.
연이는 자신이 마른 이끼와 풀을 수북이 깔아 놓은 자리 위에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젖은 옷은 어느새 반쯤 말라 있었고, 몸 위에는 무언가가 덮여 있었지요. 손으로 만져 보니 커다란 잎사귀들이었어요. 단풍잎처럼 붉은빛을 띠었는데 크기는 사람 손바닥 서너 개를 합친 만했고, 이상하게도 비단처럼 부드럽고 따뜻했습니다. 그 잎사귀 이불 덕분에 물에 젖었던 몸이 얼지 않았던 것이지요.
내가 살아 있구나. 연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동굴 안쪽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쿵, 하고 바위가 울리는 소리가 났어요. 이어서 무엇인가 묵직한 것이 바닥을 끄는 소리가 스르륵 들려왔지요. 연이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숨을 멈춘 채 그쪽을 바라보는데, 푸른 이끼 빛 속으로 서서히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것은 연이가 평생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는 생김새였습니다. 몸길이는 소 두 마리를 이어 붙인 것보다 길었고, 온몸이 놋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로 겹겹이 덮여 있었지요. 비늘은 어두운 곳에서는 검푸르게, 빛을 받으면 청동처럼 푸르스름하게 번뜩였습니다. 길쭉한 주둥이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등을 따라 톱니 같은 돌기가 꼬리 끝까지 솟아 있었어요. 굵고 긴 꼬리가 바닥을 한 번 쓸 때마다 작은 돌멩이들이 굴러다녔고요.
훗날 서역의 책을 본 선비들이 이야기하기를, 남쪽 바다 건너 큰 강에 '악어'라는 짐승이 사는데 생김새가 꼭 그러하다고 했답니다. 하지만 그날 밤의 연이에게 그런 이름이 있을 리 없었지요. 연이의 눈에 비친 그것은 그저 사람을 통째로 삼킬 수 있는 거대한 괴물일 뿐이었습니다.
"아아……."
연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신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아비에게 팔리지 않으려고 도망쳤더니, 이제는 물속 괴물의 밥이 되는구나. 연이는 몸을 웅크리고 눈을 꼭 감았어요. 목에 걸린 가락지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서, 속으로 어머니를 불렀지요. 어머니, 저 이제 어머니 곁으로 가나 봅니다.
괴물의 숨결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어요. 짐승의 비린내가 아니라, 비 갠 뒤 숲에서 맡을 수 있는 풀 냄새와 깨끗한 물 냄새가 났거든요. 그리고 기다리던 이빨 대신, 무언가 부드러운 것이 연이의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습니다.
연이가 실눈을 뜨고 보니, 괴물이 앞발로 붉은 잎사귀 한 장을 더 집어 와 미끄러져 내린 이불 위에 덮어 주고 있었어요. 날카로운 발톱으로 혹시라도 살갗을 긁을까 조심하는 듯, 그 움직임은 한없이 느리고 신중했습니다.
연이는 그제야 괴물의 눈을 똑바로 보았어요. 커다란 눈동자는 호박처럼 노랗게 빛났는데, 그 속에는 짐승의 굶주림도, 사나운 살기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주 오래된 우물을 들여다볼 때처럼, 깊고 잔잔하며 어딘가 쓸쓸한 빛이 고여 있었지요. 그 눈빛에 연이는 묘하게도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때였어요. 괴물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낮고 울리는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바위가 갈라지는 소리 같았지만, 이내 그것이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두려워 말거라. 너를 해치려고 건져 낸 것이 아니니."
연이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괴물이, 사람의 말을 하다니요. 너무 놀란 나머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는 연이를 보며, 괴물은 천천히 머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어요.
"나는 이 소에서 삼백 년 하고도 일흔 해를 살아온 몸이다. 산 사람들은 나를 이무기라 부르기도 하고 요물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는 청린(靑鱗)이라 이름한다. 푸른 비늘이라는 뜻이지. 물에 떨어진 너를 건져 이리로 데려온 것은 나다. 사흘 밤낮을 깨어나지 못하기에, 혹여 영영 눈을 뜨지 못할까 걱정하였느니라."
사흘이나 지났다니요. 연이는 그제야 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아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마에는 무언가 축축한 것이 붙어 있었는데, 만져 보니 쑥과 이름 모를 풀잎을 짓이겨 붙인 것이었어요. 상처를 돌봐 준 흔적이었지요.
"어찌……, 어찌하여 저를 살려 주셨습니까."
간신히 목소리를 짜낸 연이의 물음에, 청린은 대답 대신 연이의 가슴께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연이가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어머니의 가락지였지요.
7. 가락지에 얽힌 서른 해 전의 인연
동굴 안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폭포 소리만이 바위벽을 타고 낮게 울려 퍼졌지요. 청린은 마치 오래된 기억을 하나하나 건져 올리듯, 느릿느릿 입을 열었어요.
"서른세 해 전 봄이었다. 그해 큰물이 져서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마다 흙탕물이 넘쳤지. 나는 그때 허물을 벗는 중이었다. 우리 같은 것들은 백 년에 한 번 묵은 몸을 벗어야 하는데, 그동안은 몸이 작아지고 힘이 다 빠져 갓 난 도롱뇽보다도 나약해진단다. 하필 그 무렵 물살에 휩쓸려 소 아래 여울까지 떠내려갔고, 그만 사람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 버렸지."
연이의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곰배 영감에게 들은 이야기와 꼭 같았으니까요.
"그물은 질기고, 나는 버둥댈수록 더 깊이 감겼다. 숨이 끊어지려던 찰나에 한 계집아이가 나를 발견하였지. 열네댓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처음에는 놀라 뒷걸음질 쳤으나, 이내 다가와 손톱이 다 갈라지도록 그물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나를 저고리 앞섶에 감싸 안고 한참을 걸어 이 소까지 데려와 주었느니라. 물에 놓아주며 그 아이가 했던 말을, 나는 지금까지 한 글자도 잊지 않았다."
청린의 노란 눈동자가 촉촉하게 흔들렸습니다.
"'다시는 잡히지 말고, 오래오래 살아라.' 그 아이는 그렇게 말하였다. 생김새가 흉하다고 돌을 던지는 이는 많았어도, 오래 살라고 빌어 준 이는 그 아이가 처음이었지. 그래서 나는 내 목덜미에서 가장 단단한 비늘 한 장을 떼어 내었다. 비늘을 떼는 것은 살을 베어 내는 것만큼 아픈 일이지만, 아깝지 않았다. 그것을 둥글게 말아 가락지로 만들어 물가 바위 위에 놓아두었지. 그 비늘에는 내 기운이 깃들어 있어, 지닌 자가 물에 빠져도 숨이 막히지 않고 한기가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비늘이 있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서든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연이는 손바닥 위의 가락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물에 담그면 따스해지던 그 묘한 기운, 목에 걸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던 그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았어요. 이것은 패물이 아니라, 한 영물이 제 살을 떼어 건넨 감사의 정표였던 것이지요.
"그 아이가……, 제 어머니입니다."
연이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청린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어요.
"알고 있다. 네가 물에 떨어지던 그 밤, 나는 오랜만에 그 비늘의 기운을 느꼈다. 서른 해 넘게 잠잠하던 것이 갑자기 불처럼 뜨겁게 타올랐지. 그 비늘이 내게 소리치는 것 같았다. 위험하다고, 어서 오라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너를 받아 안았을 때, 네 얼굴을 보고 단번에 알았다. 그 아이와 눈매가 꼭 닮았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이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 누구도 연이에게 어머니를 닮았다고 말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아비는 딸의 얼굴을 보면 죽은 아내가 떠오른다며 외면하기 일쑤였고, 마을 사람들은 가엾다는 눈빛만 보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이 흉측한 비늘의 괴물이, 서른 해도 더 지난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어미는……, 잘 지내느냐."
조심스럽게 묻는 청린에게, 연이는 어머니가 일곱 해 전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이 가락지를 쥐여 주며 무슨 말을 남겼는지도요. 청린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도록 말이 없었어요. 그러다 고개를 들어 동굴 천장을 바라보며 낮게 울었지요. 그 울음은 폭포 소리에 섞여 동굴 밖으로 흘러 나갔는데, 훗날 갈목리 사람들은 그 무렵 비 오는 밤마다 산골짜기에서 구슬픈 소리가 들렸다고 수군거렸답니다.
그렇게 사흘이 더 흘렀습니다. 연이의 상처는 청린이 물어다 준 약초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아물었어요. 청린은 아침이면 소 바닥에서 은어와 쏘가리를 잡아 와 동굴 앞 너럭바위 위에 내려놓았고, 연이는 막동이가 준 부싯돌로 불을 피워 그것을 구웠지요. 처음엔 청린이 다가올 때마다 움찔하던 연이도, 어느새 그 커다란 몸집 옆에 앉아 불을 쬐는 것이 편안해졌습니다.
밤이 되면 둘은 동굴 입구에 나란히 앉아 폭포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청린은 삼백 년 세월 동안 보아 온 것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임진년 왜란 때 피난민들이 이 골짜기로 숨어들어 소의 물을 마시며 목숨을 부지했던 일, 어느 해 가뭄에 마을 사람들이 소 앞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기에 몰래 구름을 불러 비를 내려 주었던 일, 그리고 그 공을 산신령이 가져가는 걸 보며 혼자 웃었던 일까지요. 연이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어느 밤, 연이가 문득 물었어요.
"청린 님은 왜 이렇게 오랜 세월을 홀로 지내셨습니까. 쓸쓸하지 않으셨어요?"
청린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대답했습니다.
"나는 용이 되기 위해 수련하는 몸이다. 천 년을 채우고 하늘이 정한 날 여의주를 머금고 승천하면, 비로소 이 흉한 비늘을 벗고 구름 위를 날 수 있다지. 그 날까지는 세상과 인연을 맺지 않고, 살생을 삼가며, 마음을 고요히 다스려야 하느니라. 원래는 그래야 했지."
"원래는……, 이라 하심은요?"
청린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꼬리로 물을 살짝 튕겨 연이의 이마에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리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떴지요. 연이는 그것이 대답을 피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았지만, 더 묻지 않았어요. 다만 마음 한구석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남았습니다. 자신을 구하느라 청린이 무엇인가를 어긴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지요.
8. 폭포 뒤편에서 보낸 고요한 나날
동굴에서의 하루는 바깥세상과는 사뭇 다른 속도로 흘러갔습니다. 해가 뜨는 것은 폭포 물줄기가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으로 알 수 있었고, 해가 지는 것은 이끼의 푸른빛이 조금씩 짙어지는 것으로 알 수 있었지요. 닭 우는 소리도, 아비의 고함 소리도, 이웃의 수군거림도 들리지 않는 곳. 연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무 걱정 없이 잠드는 밤을 맞이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연이는 동굴 구석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어요. 바위벽 한쪽이 마치 서가처럼 움푹 파여 있었는데, 그 안에 온갖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지요. 녹슨 놋수저 한 벌, 반쯤 썩은 나무 빗, 실이 다 풀린 복주머니, 아이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짚신 한 짝, 그리고 귀퉁이가 닳아 버린 언문 책 한 권까지요. 연이가 조심스레 그것들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청린이 다가와 머쓱하게 헛기침을 했습니다.
"그건……, 소에 떨어진 것들이다. 삼백 년 동안 사람들이 이 물에 흘리고 간 것들이지. 버리기가 어쩐지 아까워 하나둘 모아 두었느니라."
연이는 그 짚신 한 짝을 손에 들었어요. 손바닥보다도 작은, 대여섯 살 아이의 짚신이었지요. 연이가 눈으로 묻자, 청린은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백 년쯤 전이었다. 나무꾼의 아들이 아비를 따라 산에 왔다가 소에 빠졌지. 물살이 세서 아비가 손을 쓸 틈도 없었다. 나는 그 아이를 물 밑에서 받아 안고 하류 쪽 얕은 여울까지 데려다 놓았다. 아이는 살았지만, 그 짚신 한 짝만은 끝내 물에 남았지. 그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해마다 단옷날이면 이 소에 와서 막걸리 한 사발을 붓고 가더구나. 무엇이 자기를 살렸는지는 끝내 몰랐겠지만, 이 물에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게지."
연이는 청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문 책을 펼쳐 보았습니다. 물에 젖었다 말랐다를 반복한 탓에 글자가 군데군데 번져 있었지만, 어떤 처녀가 시집가며 베껴 쓴 내방가사인 듯했어요. 연이는 어머니에게 언문을 배웠기에 더듬더듬 읽을 수 있었지요. 그날 밤 연이는 이끼 빛 아래서 그 가사를 소리 내어 읽어 주었고, 청린은 꼬리를 둥글게 말고 누워 눈을 감은 채 귀를 기울였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아는구나. 나는 삼백 년을 살았어도 저 꼬불꼬불한 것들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이 물가에 앉아 그것을 읽으며 웃고 우는 것을 늘 신기하게 여겼지."
"그럼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청린 님은 귀가 밝으시니 금방 익히실 거예요."
그날부터 연이는 동굴 바닥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써 가며 청린에게 언문을 가르쳤습니다. 커다란 발톱으로 모래 위에 '가' 자를 그리느라 쩔쩔매는 청린의 모습에, 연이는 배를 잡고 웃었지요. 청린은 처음에는 무안해하더니, 이내 저도 따라 우스운 소리를 내며 웃었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치는데, 마치 오래된 바위가 처음으로 웃음을 배우는 것만 같았어요.
사흘째 되던 날, 청린은 마침내 모래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 세 자를 써냈습니다. 연이가 들여다보니 '송', '연', '화'였어요. 어머니의 성과 자신의 이름이었지요. 연이는 그 글씨를 오래도록 내려다보다가, 소매로 슬며시 눈가를 훔쳤습니다. 아비조차 불러 주지 않던 제 이름을, 이 비늘 짐승이 처음 배운 글자로 써 준 것이었으니까요.
그렇게 폭포 뒤편의 나날은 고요하고 따스하게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바깥세상은 결코 두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지요. 산 아래에서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그믐밤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으니까요.
9. 막동이가 전해 온 소식, 그리고 드러난 진실
동굴에서 지낸 지 이레째 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연이가 동굴 입구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폭포 바깥쪽 바위 위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휘파람을 불었어요. 세 번 길게, 두 번 짧게. 어린 시절 막동이와 가재를 잡으며 서로를 부르던 신호였지요.
연이가 놀라 바위틈으로 내다보니, 정말로 막동이가 서 있었습니다. 옆에는 지팡이를 짚은 곰배 영감도 함께였어요. 두 사람은 연이가 물에 빠진 뒤로 날마다 몰래 용소 주변을 살폈다고 했습니다. 시신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혹시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다 오늘 아침, 폭포 뒤편에서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연이는 망설였어요. 청린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알려도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청린이 낮게 말했습니다.
"괜찮다. 저 노인은 수십 년을 이 골짜기에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내 물을 더럽힌 적이 없다. 그리고 저 젊은이에게서는 네 어미의 기운이 조금 묻어 있구나. 은혜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게 해서 막동이와 곰배 영감은 폭포 뒤편 동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처음 청린을 본 막동이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지요. 반면 곰배 영감은 의외로 담담했어요. 그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청린 앞에 공손히 절을 올렸습니다.
"역시 계셨군요. 젊을 적에 길을 잃었을 때 물소리로 저를 이끌어 주신 분이 바로 영물님이셨습니까."
청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곰배 영감은 허허 웃으며 눈가를 훔쳤습니다. 그렇게 묘한 인연들이 한자리에 모였지요. 그리고 막동이가 가져온 소식은, 모두의 얼굴을 굳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누님, 큰일이오. 권진사가 누님이 죽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소. 그 술사 도문이란 놈이 날마다 소 주변에서 무슨 점을 치더니, 가락지의 기운이 아직 살아 있다고 했답디다. 그래서 오늘 밤 그믐에 맞춰 사람들을 모아 소를 덮친다는 거요. 산적 놈들까지 서른 명이 넘소."
막동이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무언가 더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남아 있는 듯했지요.
"그리고……, 누님. 이건 정말 하기 싫은 말인데, 알아야 할 것 같아 전하오. 내가 권진사 댁 사랑채 툇마루 밑에 숨어서 들은 이야기요. 권진사가 누님을 첩으로 들이려 한 건 애초에 핑계였소. 그 술사 놈이 진사한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속리산 용소에 수백 년 묵은 이무기가 사는데, 그놈 몸속에 여의주가 자라고 있다고. 그걸 손에 넣으면 불로장생은 물론이요,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그런데 그 이무기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잡을 길이 없고, 오직 그놈의 비늘을 지닌 사람만이 미끼가 될 수 있다는 거요."
동굴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막동이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어요.
"술사는 누님의 가락지가 바로 그 비늘이라는 걸 알아냈소.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누님 아버지가 노름판에서 술에 취해 떠벌렸답디다. 죽은 마누라가 용소에서 얻은 신기한 가락지가 있는데, 물에 넣으면 따뜻해진다고. 그 말이 돌고 돌아 도문의 귀에 들어간 거지요. 그리고……, 누님 아버지는 이 모든 걸 알고 있었소. 누님을 미끼로 쓴다는 것까지. 여의주를 얻으면 따로 쌀 백 석을 더 받기로 약조했답디다."
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빨래 방망이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지요. 아비가 노름빚 때문에 자신을 팔았다는 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어요. 가난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고, 애써 이해하려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달랐습니다. 아비는 딸이 괴물을 꾀어내는 미끼가 되어 어떤 꼴을 당할지 알면서도, 쌀 백 석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지요. 딸의 목숨이, 어머니가 구해 준 생명의 정표가, 아비에게는 그저 값을 매길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연이는 동굴 벽에 기대어 무너지듯 주저앉았어요.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큰 슬픔은 눈물도 말려 버리는 법이지요. 곰배 영감이 다가와 연이의 등을 쓸어 주었지만, 연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청린이 묵직한 몸을 끌고 연이 곁으로 다가왔어요. 그리고 커다란 머리를 연이의 무릎 옆에 가만히 내려놓았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차갑고 단단한 비늘에서 이상하게도 따뜻한 기운이 번져 왔지요. 연이는 그제야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청린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었어요. 청린은 그 울음이 다 그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곁을 지켜 주었습니다.
한참 뒤, 울음을 그친 연이가 고개를 들었어요. 그리고 결연한 얼굴로 청린을 바라보았지요.
"청린 님, 저 때문에 위험해지셨습니다. 저들이 노리는 건 청린 님의 여의주예요. 제가 이 가락지를 가지고 멀리 떠나면, 저들은 저를 쫓아올 겁니다. 그러면 청린 님은 무사하실 거예요."
청린은 대답 대신 코웃음 같은 숨을 내뿜었습니다. 그 바람에 연이의 앞머리가 휘날렸지요.
"어리석은 소리. 나는 삼백 년을 이 물속에서 살았다. 그동안 이 소를 노린 자가 저들이 처음인 줄 아느냐. 그리고 한 가지 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청린은 동굴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어요.
"용이 되려는 자는 세상과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 나는 서른세 해 전, 네 어미에게 비늘을 떼어 준 그날 이미 그 금기를 어겼다. 하늘이 정한 승천의 날은 그때부터 한 번도 오지 않았느니라. 그래도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가 내게 오래 살라고 빌어 주었듯, 나는 그 아이의 딸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것이면 족하다."
연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막동이는 소매로 눈물을 훔쳤고, 곰배 영감은 고개를 돌려 동굴 밖 하늘을 바라보았지요. 그 하늘 위로, 그믐을 앞둔 가느다란 달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습니다.
10. 그믐밤을 앞둔 계책
해가 서쪽 능선 너머로 기울기 시작하자, 동굴 안의 네 사람과 한 영물은 머리를 맞대고 앉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세 사람이 둘러앉고, 청린이 그 뒤에서 커다란 몸을 둥글게 말아 모두를 감싸 안은 모양새였지요. 이끼 빛이 은은하게 비추는 동굴 안은 마치 커다란 둥지 같았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곰배 영감이었어요. 영감은 곰방대에 불도 붙이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바닥에 길을 그려 가며 말했습니다.
"저놈들이 서른이 넘는다 했지. 아무리 영물님이라 해도 횃불과 칼을 든 장정 서른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게요. 게다가 그 도문이란 술사가 마음에 걸리오. 그놈이 들고 다니는 쇠사슬과 부적 말이오. 예전에 금강산 쪽에서 이무기를 잡겠다고 설치던 무당패를 본 적이 있는데, 그놈들도 꼭 그런 걸 들고 다녔지. 쇠에 주문을 새기고 피를 먹인 사슬이라던가."
청린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아졌습니다.
"박쇠련(縛鐵鍊)이로구나. 용이 되려는 것들의 기운을 묶는 사슬이다. 그것에 감기면 나는 물을 부르지 못하고 힘을 쓸 수 없게 되지. 오래전에 한 번 그것에 묶여 사흘 밤낮을 버둥댄 적이 있다. 그때는 마침 큰비가 와서 소가 넘치는 바람에 겨우 빠져나왔지만."
막동이가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지금 당장 보은 관아로 달려가겠소. 사또 나리께 권진사가 산적을 사서 사람을 해치려 한다고 고하는 거요. 진사가 사또와 친하다고는 하나, 산적을 부린 건 나라의 법도를 어긴 큰 죄요. 증좌만 있으면 사또도 모른 척할 수 없을 거요."
"증좌라면 내가 서겠다."
곰배 영감이 나섰습니다. 영감은 지난 열흘 사이 산적 무리가 권진사 댁 마름에게 엽전 꾸러미를 받는 장면을 산 중턱에서 똑똑히 보았다고 했지요. 게다가 권진사 댁이 지난 몇 해 동안 흉년마다 고리로 곡식을 놓아 마을 사람들의 논밭을 빼앗은 일도, 영감은 날짜까지 꼼꼼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약초꾼으로 집집마다 드나들며 들은 억울한 사연들이 영감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오. 관아까지는 아무리 서둘러도 반나절 길인데, 오늘 밤 안에 사또를 모시고 돌아오려면 빠듯하오."
막동이의 말에 모두 잠시 말이 없었습니다. 그때 청린이 고개를 들었어요.
"내가 시간을 벌겠다. 저들이 이 소에 이르면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티면 되는 일이다. 너희는 관아의 사람들을 데리고 오너라. 저들이 이 골짜기에서 저지른 짓을 사또라는 자가 제 눈으로 보게 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니."
연이는 청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말 속에 숨은 뜻을 알 수 있었거든요. 청린은 혼자서 서른 명의 장정과 술사를 상대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자신을 묶을 수 있는 사슬을 든 자를 상대로요.
"저도 남겠습니다."
연이가 말하자 모두의 눈이 연이에게로 쏠렸습니다. 막동이가 펄쩍 뛰었지요.
"누님, 그게 무슨 소리요! 누님은 우리와 함께 관아로 가야 하오. 여기 있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저들이 노리는 건 이 가락지예요. 가락지가 여기 있어야 저들이 이곳으로 옵니다. 제가 떠나면 저들은 저를 쫓아 산을 헤맬 테고, 그러면 사또께서 오셔도 저들을 잡을 수 없어요. 그리고……."
연이는 청린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머니가 청린 님을 구해 드렸을 때도 혼자셨다지요. 이번에는 제 차례예요. 이 가락지는 어머니가 청린 님께 받은 거고, 이제는 제가 청린 님을 지켜 드릴 차례입니다."
청린은 오래도록 연이를 바라보았어요. 그 노란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였지요. 서른세 해 전 그물 속에서 자신을 꺼내 주던 작은 손, 그 손을 닮은 또 하나의 손이 지금 자기 앞에 있었으니까요. 마침내 청린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고집도 네 어미를 꼭 닮았구나. 좋다. 대신 내 곁을 한 발짝도 떠나지 말거라."
그렇게 계책이 정해졌습니다. 막동이와 곰배 영감은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갔어요. 영감의 절룩이는 다리로는 관아까지 가는 데 한참이 걸릴 터라, 막동이는 영감을 업고 가겠다며 등을 내밀었지요. 영감은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결국 못 이기는 척 막동이의 등에 업혔습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연이는 두 손을 모았어요. 부디 늦지 않게 돌아와 주기를.
그날 밤 하늘에는 달이 없었습니다. 그믐이었으니까요. 별빛마저 짙은 구름에 가려, 골짜기는 손을 내밀면 손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지요. 바람 한 점 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오직 폭포 소리만이 끝없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11. 횃불의 습격과 술사의 쇠사슬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어요. 산 아래쪽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번이더니, 이내 수십 개의 발소리가 겹쳐 땅을 울리기 시작했지요. 이윽고 골짜기 어귀에 불빛이 하나둘 나타났습니다. 하나, 둘, 열, 스물……. 횃불이 끝도 없이 늘어나더니 마침내 소를 빙 둘러싸고 붉은 고리를 만들었어요.
동굴 입구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연이는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횃불 아래로 드러난 얼굴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었지요. 얼굴에 칼자국이 난 산적들, 몽둥이를 든 권진사 댁 머슴들, 그리고 그들 사이로 가마 한 채가 들어섰습니다. 가마에서 내린 것은 비단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노인, 바로 권필상 진사였어요. 진사는 소를 내려다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는데, 그 얼굴에는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웃음이 걸려 있었지요.
그 곁에는 술사 도문이 서 있었습니다. 도문은 소 가장자리에 향을 피우고, 누런 부적을 사방 바위에 하나씩 붙여 나갔어요. 부적이 붙을 때마다 바위에서 희미하게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지요. 그리고 맨 뒤쪽에서, 연이는 그 얼굴을 보고 말았습니다. 아비 윤만석이었어요. 아비는 횃불 하나를 쥐고서 연신 두리번거리며 산적들 틈에 섞여 있었습니다. 열흘 사이에 더 수척해진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이상하게 번들거렸지요. 쌀 백 석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었을까요.
도문이 부적을 다 붙이고 나자, 소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주문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웅얼거림이었는데, 그 소리가 커질수록 소의 수면이 이상하게 들끓기 시작했어요. 마치 물 밑에서 무언가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듯이요. 동굴 안쪽에서 청린이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청린 님!"
연이가 돌아보자, 청린은 이를 드러낸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어요. 도문의 주문이 청린의 기운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지요.
"괜찮다. 이 정도 잡술로는 나를 끌어낼 수 없다. 허나 저놈이 사슬을 꺼내기 전에 끝을 내야겠구나."
그때 소 건너편에서 권진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윤가야! 네 딸년이 저 안에 숨어 있다는 게 확실하렷다? 어서 불러내 보거라!"
아비가 횃불을 들고 비척비척 소 가장자리로 나섰어요. 그리고 폭포 쪽을 향해 목청을 높였지요.
"연아! 아비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 이 아비 말 좀 들어 보거라. 진사 어른께서 너를 용서해 주신다는구나. 그 가락지만 내놓고 나오면, 다 없던 일로 해 주신단다. 아비가 잘못했다. 이 아비를 살리는 셈 치고, 제발 나오너라!"
그 목소리에는 눈물까지 섞여 있었습니다. 순간 연이의 마음이 흔들렸어요. 아비가 잘못했다고 했습니다. 일곱 해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지요. 어쩌면, 정말 어쩌면 아비가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아닐까. 연이가 저도 모르게 바위 밖으로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청린의 꼬리가 연이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보아라."
청린이 턱짓으로 가리킨 곳을 보니, 아비의 등 뒤로 산적 서넛이 그물과 밧줄을 들고 바위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었어요. 아비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딸을 부르면서, 한 손을 등 뒤로 돌려 그들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지요. 기다리라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요.
연이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위에 기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기대마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어요. 아비는 끝까지 딸을 미끼로 쓰고 있었습니다. 눈물마저도 딸을 꾀어내기 위한 연기였던 것이지요.
연이가 끝내 나오지 않자, 권진사는 참을성을 잃었습니다.
"에잇, 더는 못 기다리겠다. 도문, 그 사슬을 던지거라! 이무기를 끌어내면 계집은 저절로 딸려 나올 게다!"
도문이 품에서 검은 쇠사슬을 꺼냈습니다. 사슬 고리마다 붉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횃불 빛을 받자 마치 핏줄처럼 번들거렸지요. 도문은 사슬 끝을 소 속으로 던져 넣으며 날카롭게 외쳤어요.
"물에 숨은 비늘 것아, 박쇠련이 너를 부른다! 나오너라!"
사슬이 물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소 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동굴 안의 청린이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지요. 보이지 않는 사슬이 청린의 몸을 옭아매는 것 같았어요. 비늘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청린의 커다란 몸이 동굴 바닥을 긁으며 물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청린 님!"
연이가 청린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청린의 몸은 점점 더 빠르게 물 쪽으로 미끄러져 갔지요. 청린은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돌려 연이를 밀어내려 했습니다.
"놓거라! 너까지 끌려간다!"
"싫어요! 절대 안 놓을 거예요!"
그 순간이었습니다. 청린과 함께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던 연이의 가슴께에서, 무언가가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어요.
12. 가락지의 빛과 여의주를 내던진 신선
어머니의 가락지였습니다. 연이의 목에 걸린 그 푸른 비늘 가락지가, 마치 한낮의 태양을 삼킨 것처럼 환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빛은 처음에는 연이의 가슴께에서만 퍼지더니, 이내 동굴을 가득 채우고 폭포를 뚫고 나가 소 전체를 푸르게 물들였습니다.
물속에서 청린을 휘감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그 빛에 닿자, 지글지글 타는 소리를 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어요. 소 바깥에서 사슬 끝을 쥐고 있던 도문이 비명을 질렀지요. 사슬을 타고 거꾸로 흘러간 푸른 빛이 도문의 손을 불에 데인 것처럼 태웠던 것입니다. 도문은 사슬을 내팽개치며 뒤로 나자빠졌어요.
"이……, 이게 무슨……! 비늘이 주인을 지킨다니, 그런 법은 없다!"
도문의 외침에 청린이 물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사슬에서 풀려난 청린의 몸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횃불을 든 사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지요. 그들은 그제야 처음으로 용소의 주인을 제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청린의 목덜미, 서른세 해 전 비늘 한 장을 떼어 냈던 그 자리에서 똑같은 푸른빛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어요. 연이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이 가락지는 그저 청린의 기운이 깃든 물건이 아니었어요. 청린의 몸 일부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청린을 묶으려던 사슬이, 청린의 비늘을 지닌 사람을 함께 끌어당기는 순간 오히려 그 힘이 거꾸로 되돌아간 것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말이 이제야 귓가에 또렷이 들렸어요. 언젠가 이 가락지가 너를 지켜 줄 날이 올 게다. 그리고 그날은, 연이가 청린을 지켜 주는 날이기도 했던 것이지요.
물 위로 솟아오른 청린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치켜들었습니다. 그리고 천지를 뒤흔드는 포효를 내질렀지요. 그 소리에 골짜기 전체가 울렸고, 나무 위에서 잠자던 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으며, 산적들의 손에 들린 횃불이 바람도 없는데 일제히 흔들렸어요. 몇몇은 그 자리에서 무기를 내던지고 엎드려 빌기 시작했습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그저 돈을 받고……!"
하지만 권진사는 달랐어요. 탐욕이 두려움을 이겼던 것이지요.
"겁먹지 마라! 저놈의 몸속에 여의주가 있다! 저놈을 잡는 자에게 쌀 천 석을 주겠다! 활을 쏴라! 창을 던져라!"
쌀 천 석이라는 말에 산적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다시 무기를 집어 들고 청린을 향해 활을 겨누었어요. 화살이 비 오듯 날아들었지만, 놋쇠 같은 비늘에 부딪혀 맥없이 튕겨 나갔지요. 창을 든 자들이 소 가장자리로 달려들었지만, 청린이 꼬리를 한 번 휘두르자 물보라와 함께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나가떨어졌습니다.
그때 연이의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어요. 아비였습니다. 아비는 혼란을 틈타 소 가장자리를 돌아 동굴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지요. 그 손에는 날이 선 낫 한 자루가 들려 있었고요. 아비의 눈은 연이를 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연이의 목에 걸린, 환하게 빛나는 가락지를 보고 있었지요.
"그 가락지만 있으면……, 그것만 있으면 저놈을 다시 묶을 수 있어. 내놔라, 연아. 그걸 내놔!"
아비가 낫을 치켜들고 연이에게 달려들었습니다. 연이는 너무 놀라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어요. 낫의 날이 횃불 빛에 번쩍이며 연이의 목덜미를 향해 떨어지는 그 찰나, 커다란 그림자가 연이의 앞을 덮었습니다.
청린이었어요. 청린은 물에서 솟구쳐 올라 연이와 아비 사이를 몸으로 막아섰지요. 아비의 낫이 청린의 목덜미에 박혔습니다. 바로 서른세 해 전 비늘을 떼어 낸 그 자리, 다른 곳보다 비늘이 얇아 유일하게 약한 그 자리였어요. 검붉은 피가 솟구쳤고, 청린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냈습니다.
"청린 님! 안 돼!"
연이의 비명이 골짜기를 울렸어요. 아비는 자기가 한 짓에 스스로 놀라 낫을 놓고 털썩 주저앉았지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문이 다시 일어섰습니다. 손이 시커멓게 타 버렸는데도 도문은 품에서 또 다른 부적을 꺼내 들고 외쳤어요.
"지금이다! 저놈이 상처를 입었다! 여의주가 빠져나온다!"
정말로 청린의 상처 자리에서 무언가가 영롱하게 빛나며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구슬이었어요. 그 안에서는 구름과 번개와 물결이 끝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지요. 삼백칠십 년 수련의 결정, 바로 여의주였습니다. 상처로 기운이 흩어지자 몸속에 갈무리되어 있던 여의주가 밖으로 밀려 나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권진사와 도문, 그리고 산적들의 눈이 일제히 그 구슬로 쏠렸습니다.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그것을 바라보았지요. 연이는 피 흘리는 청린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었어요.
"청린 님, 어서 다시 삼키세요! 그게 없으면 용이 될 수 없잖아요!"
청린은 연이를 내려다보았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했지요. 그리고 청린은 아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연아. 나는 용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 말과 함께 청린은 여의주를 입에 물었습니다. 그러나 삼키지 않았어요. 대신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여의주를 콰직, 소리가 나도록 깨물어 부수었지요.
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깨어진 여의주 속에서 삼백칠십 년 동안 갈무리된 물의 기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어요. 맑은 하늘이었던 그믐밤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고, 번개가 연달아 내리꽂혔습니다. 그리고 폭포가 거꾸로 솟구쳤지요. 소의 물이 하늘로 치솟아 거대한 물기둥을 이루더니, 그것이 한 마리 용처럼 몸을 틀어 소 주변을 휩쓸었습니다.
물기둥은 산적들의 무기를 모조리 빼앗아 계곡 아래로 쓸어 갔어요. 횃불이 하나도 남김없이 꺼졌고, 사내들은 물살에 휩쓸려 이리저리 나뒹굴었지요. 도문이 붙여 놓은 부적들은 갈기갈기 찢겨 나갔고, 도문 자신은 물기둥에 휘말려 비명과 함께 폭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권진사는 가마 기둥을 붙잡고 버티다가 결국 진흙탕 속으로 처박혔어요. 그 화려하던 비단 도포가 흙탕물에 범벅이 되어, 그 꼴은 마치 물에 빠진 생쥐와 다를 바 없었지요.
신기한 일은, 그 거센 물살이 연이와 청린, 그리고 주저앉아 있던 아비만은 비켜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기둥이 지나간 자리에 아비는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 있었어요. 청린이 마지막 순간까지, 딸을 해치려 한 그 아비마저 살려 두었던 것이지요.
물이 잦아들고 먹구름이 걷히자, 동쪽 하늘이 희부옇게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에서 수많은 발소리와 함께 징 소리가 울려 퍼졌지요. 이번에는 횃불이 아니라 관아의 깃발이었어요. 막동이와 곰배 영감이 보은 현감을 모시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13. 새벽의 관아 행렬과 무너진 탐욕
보은 현감 이경후는 마흔을 갓 넘긴 사람으로, 이 고을에 부임한 지 아직 한 해가 채 되지 않았습니다. 전임 사또가 권진사와 술잔을 기울이며 형님 아우 하던 사이였다는 이야기는 그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요. 하지만 이 현감은 그런 관행에 물들지 않은 몇 안 되는 관리였어요. 막동이가 숨을 헐떡이며 동헌 마당에 엎드렸을 때, 이 현감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 고을에서 가장 세도 높은 양반이 산적을 사서 산골 처자 하나를 쫓는다니,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으니까요.
하지만 곰배 영감이 나서자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영감은 막동이 등에서 내려 지팡이를 짚고 동헌 마루 앞에 서더니, 권진사 댁이 지난 여섯 해 동안 고리로 곡식을 놓아 빼앗은 논밭의 내력을 하나하나 읊기 시작했지요. 어느 해 어느 마을 누구네 논 몇 마지기, 몇 석을 빌려주고 몇 석을 받아 갔는지, 갚지 못해 쫓겨난 집이 몇 집이고 그중 굶어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까지요. 날짜 하나, 숫자 하나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적 무리가 권진사 댁 마름 장두칠에게 엽전 꾸러미를 받던 날의 일을 덧붙였어요.
이 현감은 말없이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곧바로 포졸과 군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말을 달려 속리산으로 향했지요. 동이 틀 무렵 관아 행렬이 용소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본 광경은 막동이의 말보다 훨씬 더 참혹했답니다.
부러진 칼과 창이 계곡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흙탕물에 젖은 산적들이 바위틈마다 넋이 나간 채 웅크리고 있었어요. 소 가장자리 바위에는 찢어진 부적 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비단 도포가 진흙 범벅이 된 권진사가 가마 옆에 쓰러져 끙끙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지요. 그리고 소 가장자리 너럭바위 위에는 한 처자가 피투성이가 된 거대한 비늘 짐승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습니다.
군관들이 짐승을 보고 놀라 칼을 뽑아 들었지만, 이 현감이 손을 들어 막았어요. 곰배 영감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지요.
"나리, 저분은 해치는 분이 아닙니다. 이 골짜기를 삼백 년 넘게 지켜 온 영물이십니다. 저 아이를 살리려다 저리 다치신 겁니다."
이 현감은 한동안 청린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갓을 바로 하고 청린을 향해 허리를 굽혀 예를 표했지요. 훗날 그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짐승의 눈빛이 사람의 것보다 더 맑아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고 합니다.
그다음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현감은 그 자리에서 산적들을 하나하나 포박하게 했고, 산적들은 살려 달라며 자기들이 권진사에게 얼마를 받고 무슨 일을 하기로 했는지 앞다투어 실토했어요. 권진사의 마름 장두칠은 도망치려다 막동이의 육모방망이에 정강이를 맞고 나뒹굴었지요. 그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훗날 두고두고 이야기하며 속 시원해했답니다.
권진사는 끝까지 발뺌했습니다. 자신은 그저 달아난 소실을 찾으려 했을 뿐이고, 산적들이 멋대로 따라온 것이라고요. 하지만 그의 품에서 떨어진 서찰 한 장이 모든 것을 증명해 주었지요. 술사 도문과 주고받은 그 서찰에는 여의주를 얻는 방법과, 그것을 위해 비늘 가락지를 지닌 처자를 미끼로 쓴다는 계획이 소상히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일이 성사되면 윤만석에게 쌀 백 석을 내준다는 약조까지도요.
이 현감은 권진사를 관아로 압송하게 했습니다. 산적을 부려 양민을 해치려 한 죄, 고리로 백성의 논밭을 갈취한 죄, 요사스러운 술사와 결탁하여 혹세무민한 죄가 차례로 물어졌지요. 세도가 아무리 높다 한들 나라의 법도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어요. 게다가 이 현감이 사건의 전말을 감영에 올리자, 그동안 권진사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소장을 들고 관아 문 앞에 줄을 섰답니다. 결국 권진사는 빼앗았던 논밭을 모두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라는 명을 받았고, 그 자신은 남쪽 먼 바닷가 고을로 귀양을 떠나게 되었지요. 예순 평생 쌓아 올린 재물과 권세가 단 한 철 만에 모래성처럼 무너진 것입니다.
술사 도문은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폭포 아래로 떨어진 뒤로 그 어디에서도 시신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어떤 이는 물살에 휩쓸려 금강까지 떠내려갔을 거라 했고, 어떤 이는 용소의 물이 그를 삼켜 버렸을 거라 수군거렸지요. 다만 몇 해 뒤, 충주 근방의 어느 장터에서 두 손이 숯처럼 시커먼 거지 하나가 '비늘, 비늘'하고 중얼거리며 떠돌아다니더라는 소문이 들려왔답니다.
14. 아비 윤만석의 처분
그리고 남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비 윤만석이었지요.
윤만석은 관아 군관들에게 붙들려 나오면서도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어요. 넋이 완전히 나가 버린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자기 손으로 휘두른 낫이 딸을 향했다는 것, 그리고 그 낫을 몸으로 막은 것이 자신이 괴물이라 부르던 바로 그 짐승이었다는 것. 그 두 가지가 그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맴돌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현감은 윤만석을 동헌 마당에 꿇어앉히고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네 이놈. 짐승도 제 새끼는 품는 법이거늘, 너는 아비의 탈을 쓰고 제 딸을 재물과 바꾸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미끼로 내주고 끝내 낫까지 휘둘렀다. 인륜을 저버린 죄가 하늘에 닿는구나. 저 산속의 비늘 짐승은 남의 자식을 살리려 제 수백 년 공덕을 버렸는데, 사람이라는 너는 제 자식을 죽이려 들었으니, 누가 짐승이고 누가 사람이란 말이냐."
그 말에 윤만석은 비로소 땅에 이마를 찧으며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하지만 그 울음이 진정한 뉘우침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다가올 형벌이 두려워서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요.
윤만석에게는 곤장 마흔 대와 함께, 권진사에게 받았던 쌀을 모두 토해 내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이미 노름판에 반을 날린 뒤라 갚을 길이 없자, 그나마 남아 있던 초가집마저 관아에 넘어가고 말았어요. 곤장을 맞고 풀려난 윤만석은 다리를 절며 마을로 돌아왔지만, 그를 반겨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웃들은 그를 보면 침을 뱉고 돌아섰고, 주막에서도 술 한 잔 내주지 않았지요. 노름판의 동무들은 빈털터리가 된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요. 결국 윤만석은 갈목리를 떠나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가 되었답니다.
15. 동헌 마당에 선 연이의 세 가지 청
권진사의 귀양이 정해지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관아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현감이 연이를 동헌으로 부른다는 전갈이었지요. 그때 청린은 아직 동굴 바닥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연이는 차마 곁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망설이는 연이를 보고, 청린이 가느다란 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다녀오너라. 네가 직접 가서 말해야 할 것들이 있을 게다.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마. 삼백 년을 기다린 몸인데, 하루쯤이야."
연이는 곰배 영감에게 청린을 부탁하고 막동이와 함께 산을 내려갔습니다. 열흘 만에 다시 걷는 마을 길이었지요. 갈목리를 지날 때, 연이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어요. 길가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나와 서 있었거든요. 그동안 연이를 가엾게 여기면서도 권진사가 무서워 아무 말 못 했던 이웃들이었습니다. 빨래터에서 함께 방망이질하던 아낙들, 삯바느질을 맡기던 이웃 할머니,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동무들까지요.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사이, 이웃 할머니 하나가 비척비척 다가와 연이의 손을 덥석 잡았어요.
"연아, 미안하다. 우리가 겁이 나서……, 너 하나 지켜 주지 못했구나. 네 어미 볼 낯이 없다."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연이는 그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저었지요. 원망하지 않는다고, 그 마음만으로도 고맙다고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이웃들도 하나둘 다가와 연이의 어깨를 다독였습니다. 어떤 아낙은 따뜻한 떡 한 덩이를 쥐여 주었고, 어떤 동무는 말없이 짚신 한 켤레를 내밀었지요. 연이는 그제야 깨달았어요. 이 마을에도 따뜻한 마음은 늘 있었다는 것을. 다만 탐욕스러운 권세가 그 마음들을 짓누르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요.
보은 관아 동헌 마당에 들어서자, 이 현감이 마루 위에서 연이를 맞았습니다. 현감은 연이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그동안의 일을 차근차근 물었지요. 연이는 아비의 노름빚부터 권진사 댁 마름의 방문, 문틈으로 엿들은 거래, 장대비 속의 도주와 용소에서의 일까지, 아는 대로 숨김없이 아뢰었습니다. 다만 막동이가 뒷문을 열어 준 일만은 입을 다물었어요. 그 일이 알려지면 막동이가 죄를 입을까 염려했던 것이지요.
이야기를 다 들은 현감은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그대가 겪은 고초가 실로 컸다. 권필상의 재산 가운데 일부를 떼어 그대에게 내리려 하니, 그것으로 새 삶을 꾸리도록 하라. 또한 그대의 아비가 받은 몸값 때문에 그대가 짊어진 허물이 있다면, 본관이 모두 없던 일로 해 주겠다."
뜻밖의 말에 연이는 잠시 말을 잃었습니다. 재산이라니요. 평생 쌀 한 됫박을 걱정하며 살아온 연이에게는 꿈에서도 떠올려 본 적 없는 이야기였지요. 하지만 연이는 마당에 엎드려 공손히 고개를 숙였어요.
"나리의 은혜가 하늘 같사오나, 쇤네는 재물을 받을 수 없사옵니다. 그 재물은 본디 권진사가 고을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니, 원래 주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대신 감히 세 가지를 청하고자 하옵니다."
현감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해 보라 하자, 연이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습니다.
"첫째, 그날 밤 쇤네를 지키느라 이 일에 휘말린 포졸 막동이에게 어떤 허물도 묻지 말아 주시옵소서. 그가 아니었다면 쇤네는 진작 끌려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옵니다. 둘째, 쇤네의 일을 증언하느라 늙은 몸으로 먼 길을 오간 곰배 영감이 남은 생을 편히 지낼 수 있도록 살펴 주시옵소서. 그리고 셋째……."
연이는 거기서 잠시 숨을 골랐어요.
"셋째, 속리산 용소에 다시는 아무도 해코지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곳의 영물은 삼백 년 동안 이 고을을 말없이 지켜 왔사옵니다. 가뭄에 비를 내리고,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 내고, 길 잃은 나그네를 이끌어 주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김새가 흉하다는 이유로 돌을 던지고, 이번에는 그 몸속의 보배를 탐내 쇠사슬까지 던졌사옵니다. 그분이 남은 날을 평온히 보내실 수 있도록, 나리께서 지켜 주시옵소서."
동헌 마당이 한동안 조용해졌습니다. 마당 한쪽에 서 있던 막동이는 연이의 첫째 청을 듣는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떨었지요. 아전들도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어요. 재물을 마다하고 남을 위한 청만 늘어놓는 처자라니, 그들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니까요.
이 현감은 천천히 일어나 마루 끝까지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연이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말했지요.
"그 아비에게서 어찌 이런 딸이 났을꼬. 아니, 그 어미를 닮은 게로구나. 좋다. 세 가지 청을 모두 들어주마."
그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막동이는 그 뒤로 허물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공을 인정받아 군관으로 승차했지요. 곰배 영감에게는 해마다 관아에서 쌀 다섯 섬이 내려졌고요. 그리고 이듬해 봄, 용소 어귀에는 커다란 돌비석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비석에는 이 현감이 친히 쓴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이 물에 깃든 영물을 해치는 자는 국법으로 다스린다'는 금령이었어요. 그 비석은 백 년이 넘도록 그 자리에 서서, 용소를 찾는 이들에게 조용히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연이가 산으로 돌아온 것은 해 질 녘이었습니다. 동굴 안에서는 곰배 영감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청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지요. 연이는 청린의 머리맡에 앉아 그 커다란 비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습니다.
"청린 님, 이제 아무도 청린 님을 해치러 오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어서 일어나세요."
대답은 없었지만, 청린의 꼬리 끝이 아주 조금, 연이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16. 용소 곁의 초막과 신선의 새 이름
한편 청린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낫이 박힌 자리는 하필 서른세 해 전 비늘을 떼어 낸 곳이라 다른 데보다 살이 얇았고, 여의주를 깨뜨리면서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기운마저 한꺼번에 흩어져 버렸지요. 사흘 동안 청린은 동굴 바닥에 늘어진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숨소리는 점점 가늘어지고, 그 푸르던 비늘은 잿빛으로 바래 갔어요.
연이는 그 사흘 동안 한시도 청린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곰배 영감이 산을 뒤져 캐 온 귀한 약초를 달여 상처에 바르고, 막동이가 길어 온 맑은 샘물로 비늘을 닦아 주었지요. 밤이면 청린의 커다란 머리를 무릎에 얹고서 어머니가 불러 주던 자장가를 나직이 불렀어요.
"자장자장 우리 아기, 꼬꼬닭아 울지 마라, 멍멍개야 짖지 마라……."
그 노래는 서른세 해 전, 어린 송씨 처자가 그물에서 건져 낸 작은 비늘 짐승을 품에 안고 용소까지 걸어가며 불러 주던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청린은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나흘째 되던 새벽, 청린이 마침내 눈을 떴습니다.
"……그 노래를,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구나."
연이는 대답 대신 청린의 목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이번에는 슬픔이 아니라 안도의 눈물이었습니다.
청린은 살아났지만, 예전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여의주를 잃었으니 이제 다시는 용이 될 수 없었지요. 구름을 부르고 비를 내리던 힘도 대부분 사라졌고, 몸집도 조금 작아졌어요. 그래도 청린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 편안한 얼굴이었지요.
"용이 되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이 골짜기도, 이 물소리도, 너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지. 삼백 년을 하늘만 바라보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내가 정말 바랐던 것은 하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내 곁에서 오래 살라고 빌어 주는 것, 그것 하나였어."
그해 가을, 막동이와 곰배 영감, 그리고 소식을 들은 갈목리 사람 몇이 힘을 모아 용소 곁 양지바른 언덕에 작은 초막 한 채를 지어 주었습니다. 권진사에게 빼앗겼던 논밭을 되찾은 사람들이 고마운 마음에 앞다투어 나섰던 것이지요. 연이는 그곳에 살며 청린과 함께 지내기로 했어요. 마을 사람들 중에는 처녀가 괴물과 함께 산다며 혀를 차는 이도 있었지만, 연이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이미 뼈저리게 알아 버렸으니까요.
연이는 곰배 영감에게서 약초 다루는 법을 배웠습니다. 영감은 자신이 평생 익힌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연이에게 가르쳐 주었지요. 어떤 풀이 열을 내리고 어떤 뿌리가 기침을 멎게 하는지, 어느 골짜기에 어떤 약초가 언제 돋아나는지까지요. 청린은 물속 깊은 곳에서만 자라는 귀한 수초들을 건져다 주었고요. 그렇게 연이는 산골 마을의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약손이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연이가 달여 준 약을 먹으면 병이 빨리 나았다고 해요. 사람들은 그것이 용소의 신령한 물로 약을 달인 덕분이라고 믿었지요.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연이를 '용소 각시'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청린에게도 새 이름이 생겼어요. 마을 아이들이 '비늘 할배'라고 부르며 소 가장자리에 앉아 청린의 꼬리를 타고 노는 날이 많아졌거든요. 삼백 년 동안 사람들에게 돌팔매질만 당하던 청린이, 마침내 아이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살게 된 것이지요.
군관이 된 막동이는 쉬는 날이면 꼭 용소에 들러 청린에게 은어 한 꾸러미를 던져 주고, 연이에게 고을 소식을 전해 주었지요. 곰배 영감은 그 뒤로 몇 해를 더 살다가, 어느 봄날 용소 곁 초막에서 연이의 손을 잡은 채 편안히 눈을 감았습니다. 영감의 무덤은 송씨 부인의 무덤 곁, 용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나란히 모셔졌어요.
17. 첫봄,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초막에서 맞는 첫봄이었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용소가 녹아 다시 폭포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기 시작하던 무렵, 연이는 청린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어요. 어머니의 무덤에 함께 가 달라는 것이었지요. 송씨 부인의 무덤은 용소에서 산등성이 하나를 넘어야 닿는, 볕이 잘 드는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청린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여의주를 잃은 뒤로 물 밖에 오래 머무는 것이 예전보다 힘에 부쳤거든요. 게다가 삼백 년 동안 한 번도 용소를 멀리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청린은 끝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해 뜨기 전 새벽,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이와 함께 산길을 올랐지요.
커다란 몸이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는 동안, 연이는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어요. 지난여름만 해도 횃불에 쫓겨 피투성이 발로 달아나던 바로 그 산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 보였지요. 진달래가 바위틈마다 연분홍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고, 새벽이슬을 머금은 풀잎들이 아침 햇살에 반짝였습니다. 같은 길이라도 누구와 함께 걷느냐에 따라 이렇게 다르구나, 연이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무덤에 이르자 연이는 가져온 술 한 잔과 떡 한 접시를 올리고 절을 했습니다. 그리고 무덤 앞에 앉아 그동안의 일을 하나하나 어머니께 이야기했지요. 아비의 일은 짧게, 청린의 일은 길게요.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보니, 청린이 무덤 앞에서 커다란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람이 절을 올리는 것처럼요.
"그대가 나를 그물에서 건져 준 그날로부터 서른세 해가 지났구려. 오래 살라 빌어 준 그 말 덕분에 나는 이렇게 아직 살아 있소. 그런데 그대는 먼저 가 버렸구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직접 전하지 못했는데."
청린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습니다. 연이는 아무 말 없이 청린의 목덜미에 손을 얹었어요. 낫에 베였던 상처는 이제 아물어 하얀 흉터로 남아 있었지요. 그 흉터는 서른세 해 전 비늘을 떼어 낸 자리와 정확히 겹쳐 있었습니다.
"청린 님, 하나 여쭤도 될까요. 어머니께 가락지를 드리실 때, 그건 그저 고맙다는 정표였나요?"
청린은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무덤가에 핀 할미꽃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지요.
"정표이기도 했고, 약속이기도 했다. 나는 그 비늘을 떼어 주며 마음속으로 이렇게 맹세했느니라. 이 비늘을 지닌 자가 위험에 처하면, 그것이 언제이든 어디이든 반드시 지키러 가겠노라고. 네 어미는 평생 그 가락지를 지녔으나 한 번도 내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지. 아니, 어쩌면 청할 틈조차 없었는지도 모르겠구나. 병이 깊어 갈 때도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니."
청린의 노란 눈동자에 회한이 어렸습니다.
"그래서 네가 물에 떨어지던 그 밤, 나는 이번만큼은 늦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네 어미에게 지키지 못한 약속을, 너에게라도 지키고 싶었느니라."
연이는 목에 걸린 가락지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침 햇살을 받은 비늘 가락지가 물결무늬를 그리며 은은하게 빛났지요. 연이는 그것을 어머니의 무덤 앞에 잠시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어 이번에는 실이 아니라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웠어요. 가락지는 처음부터 그 자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꼭 맞았답니다.
"어머니, 이제 제가 이 약속을 이어 갈게요. 청린 님이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켜 주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청린 님 곁을 지킬게요. 청린 님이 쓸쓸하지 않도록, 다시는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하도록요."
그 순간 언덕 위로 따스한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습니다. 무덤가의 할미꽃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듯 흔들렸고, 어디선가 꾀꼬리 한 마리가 맑게 울었지요. 연이는 그것이 어머니의 대답이라고 믿었어요. 잘했다고, 내 딸아, 참 잘했다고요.
산을 내려오는 길, 청린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연이를 돌아보았습니다.
"연아. 내가 용이 되었더라면, 오늘 이 길을 함께 걷지 못했겠지."
"그럼요. 청린 님은 저 높은 구름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계셨을 거예요."
"그것도 나쁘지는 않았겠다만……."
청린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연이의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를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다시 앞을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덧붙였지요.
"이쪽이 훨씬 낫구나."
연이는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그 웃음소리가 봄 산골짜기에 메아리치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지요.
18. 눈 내리던 겨울, 초막 앞에 선 아비
그로부터 세 해가 흘렀습니다. 어느 해 겨울, 속리산에 그해 첫눈이 소복이 내리던 저녁이었지요. 연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초막 사립문 밖에서 누군가 쿨럭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어요.
연이가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눈 덮인 길 위에 한 사내가 쓰러지듯 서 있었습니다. 누더기를 겹겹이 걸치고, 발에는 짚신 대신 헝겊을 감았으며,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 얼굴의 반을 덮고 있었지요. 사내는 연이를 보자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습니다. 그 몸짓에서 연이는 단번에 알아보았어요. 아비 윤만석이었습니다.
세 해 동안 아비가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연이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몰골만 보아도 짐작할 수는 있었지요. 노름판을 기웃거리다 쫓겨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쫓겨나고, 결국 빌어먹는 처지가 되어 고을과 고을을 떠돌았을 테지요. 그러다 어찌어찌 이 골짜기까지 흘러들어 온 것이었습니다.
아비는 연이를 똑바로 보지 못했어요. 눈 위에 무릎을 꿇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지요.
"용소 각시가……, 아픈 사람을 거저 고쳐 준다기에……. 네가 여기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연이는 따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비의 손을 보았어요.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오르고, 손가락 마디마다 피가 터져 있었지요. 기침을 할 때마다 그 손이 가슴을 움켜쥐는 것이, 속병이 깊어 보였습니다.
연이의 마음속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다투었어요. 하나는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잊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딸을 팔아 쌀가마니를 들였고, 미끼로 내주었으며, 끝내 낫까지 휘두른 사람이라고요. 또 하나의 목소리는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들렸지요. 어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머니는 그물에 걸린 흉측한 짐승을 보고도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생김새가 무섭다고, 요물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것을 알면서도 품에 안아 물가까지 데려다주었지요. 그 작은 선의가 서른 해를 돌고 돌아, 끝내 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연이는 말없이 돌아서서 초막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비는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떨구었지요. 쫓겨나는 것이라 생각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잠시 뒤 연이가 다시 나왔을 때, 그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약사발과 쌀 한 자루, 그리고 솜을 두툼하게 넣은 버선 한 켤레가 들려 있었습니다.
"이 약은 기침에 좋은 도라지와 배를 달인 것이에요. 사흘 동안 아침저녁으로 데워 드세요. 버선은 발이 얼지 않게 꼭 신으시고요. 쌀은……, 다시는 노름판에 들고 가지 마세요."
연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미움도 원망도 담기지 않은, 그렇다고 다정하지도 않은 목소리였지요. 마치 지나가는 병자에게 약을 건네듯이요. 연이는 아비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초막 안으로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용서와 잊음은 다른 것이니까요. 연이는 아비를 용서할 수는 있어도, 그가 했던 일을 잊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연이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었지요.
아비는 떨리는 손으로 약사발을 받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사발을 내려다보더니,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이번에는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속이려는 눈물도, 형벌이 두려워 흘리는 눈물도 아니었지요. 늦어도 너무 늦게 찾아온, 그러나 분명한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내가……,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 네 어미가 하늘에서 나를 얼마나 원망할꼬……."
연이는 대답하지 않았어요. 대신 고개를 돌려 용소 쪽을 바라보았지요. 눈발 사이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소 위에, 커다란 머리 하나가 조용히 떠올라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청린이었어요. 청린은 아무 말 없이 연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였습니다. 잘했다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이요.
아비는 쌀자루를 짊어지고 눈길을 따라 산을 내려갔습니다.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고, 또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면서요. 연이는 그 뒷모습이 눈보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사립문 앞에 서 있었지요. 그 뒤로 아비가 다시 용소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듬해 봄, 이웃 고을 절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는 늙은 불목하니가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날마다 새벽이면 속리산 쪽을 향해 절을 한다는 이야기가 바람결에 전해져 왔답니다.
19. 용소에 전해지는 마지막 이야기
연이는 그 뒤로도 오래도록 용소 곁에서 살았습니다. 혼인을 하지는 않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았어요. 아픈 사람들이 찾아오면 약을 지어 주었고,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찾아오면 거두어 먹이고 글을 가르쳤지요. 초막은 해가 갈수록 조금씩 넓어졌고,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은 저마다 세상으로 나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세월 동안, 청린은 늘 연이 곁에 있었어요. 봄이면 소 가장자리 바위 위에서 함께 진달래를 바라보았고, 여름이면 폭포 아래서 아이들을 등에 태워 물놀이를 시켜 주었지요. 가을이면 붉은 단풍잎을 한 아름씩 물어다 초막 지붕 위에 뿌려 주었고, 겨울이면 꽁꽁 언 소 밑에서 연이가 불러 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긴 잠을 잤습니다. 처음 만난 그 밤 연이의 어깨를 덮어 주었던 붉은 비단 잎이, 해마다 가을이면 초막 마당에 수북이 쌓였다고 해요.
세월이 흘러 연이의 머리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렸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연이가 여든을 넘긴 어느 해 늦가을 밤, 용소에 오랜만에 큰비가 내렸다고 하지요. 그날 밤 폭포 소리 사이로 무언가 나지막이 노래하는 소리가 들렸고, 날이 밝자 초막은 텅 비어 있었답니다. 연이도, 청린도 그 뒤로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어요.
다만 그날 아침 용소 가장자리 너럭바위 위에서, 마을 아이 하나가 무언가를 주웠다고 합니다.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비늘 가락지 두 개였어요. 하나는 오래되어 빛이 은은했고, 다른 하나는 갓 떼어 낸 것처럼 영롱했지요. 두 가락지는 서로 맞물리듯 겹쳐져 있었답니다. 그 가락지는 지금도 속리산 어느 작은 암자에 모셔져 있다고도 하고, 어느 착한 처자의 손에서 손으로 대를 이어 전해진다고도 합니다.
갈목리의 늙은이들은 지금도 비 오는 밤이면 손주들에게 이렇게 들려준다지요. 용소에는 용이 되지 못한 비늘 할배가 산단다. 그런데 그 할배는 용이 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용이 되지 않기로 한 것이란다. 하늘 대신 사람의 곁을 택했으니, 어쩌면 그것이 용보다 더 귀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 곁에는 언제나 한 처자가 있었단다. 제 아비에게 버림받았으나, 끝내 그 아비에게조차 쌀 한 자루를 건넨 처자가.
🎬 [클로징 - 잔잔하게 스며드는 가야금 소리]
오늘 밤 들려드린 이야기는 속리산 용소에 얽힌 비늘 가락지의 사연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지요. 사람의 얼굴을 한 아비는 제 딸을 쌀가마니와 바꾸었고, 비단 도포를 두른 양반은 남의 목숨을 미끼 삼아 불로장생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괴물이라 손가락질하던 비늘 짐승은, 삼백 년을 기다려 온 하늘의 문을 스스로 닫고 한 처자의 목숨을 지켰지요. 누가 짐승이고 누가 사람이었을까요.
어린 처자의 작은 손이 그물에 걸린 생명을 풀어 준 그 봄날, 그 선의는 서른 해를 돌고 돌아 다시 그 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자신을 해치려던 아비에게조차 약사발을 건넸지요. 선한 마음이란 그렇게, 물결처럼 번져 나가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의 어깨를 따스하게 덮어 주는 법인가 봅니다. 마치 그 밤, 동굴 속에서 연이의 어깨를 덮어 주던 붉은 비단 잎처럼요.
겉모습이 화려하나 마음이 차가운 이보다, 생김새는 낯설어도 약한 이를 감싸 안는 진심이 참된 복이 된다는 옛이야기. 오늘 밤은 그 따스한 기운을 가슴 가득 품으시고, 폭포 소리처럼 고요하고 깊은 잠에 빠져 보시길 바랍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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